존샨필모/율래/ 청춘연가

석율그래/ 청춘연가 03

킷w 2015. 9. 6. 23:48

 

 

 

 

03.

그대로 그렇게

 

 

 

 

 

 

 

 

 

 

  "내 사랑하느은- 그대여, 정말 가려나. 내 가슴 속에 외로움 남겨 둔 채로오. 내 사랑하느은- 그대여, 정말 가려나. 내 가슴 속에 서글픔 남겨 둔 채로."

 

 

 

  혼자 부르던 노래에 작은 목소리가 하나 붙었다. 엄마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고, 나를 따라 유행가 가사를 읊조렸다. 속을 가르니 노오란 빛깔이 달콤해 보이는 호박고구마를 나란히 앉아 까먹었다. 굳은살 박인 친구들 손에 비하면 여린 손이지만 엄마를 위해서 뜨겁지 않은 척 고구마를 까서 내밀었다. 겨우내 창백했던 얼굴이 뜨거운 고구마에 혈기가 돌았다.

 

 

 

  "연이네 에서 준 고구마라고 했나?"

  ", 고모네 가 고구마농사를 한대."

 

 

 

  엄마는 연이가 남자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고, 엊그제 상품가치 없는 고구마라며 건네주러 온 장그래를 보고 두 번 놀랬다. 어쩜 그렇게 잘 생겼느냐고 웃는 엄마 때문에 장그래는 얼굴부터 귀 끝,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래가 나가고 엄마는 누가 들을까봐 조심하는 모양새로 내게 속삭였다.

 

  - 남자애가 듣기에 기분나쁠까봐 잘생겼다고 했는데, 참 곱게 생겼네.

 

  성격은 완전 투박해. 근데 귀여워. 하고 말했더니, 아까 부끄럼타는 게 엄마 눈에도 귀엽더라며 웃었다. 나는 엄마가 듣기에 마음 상할까봐 말은 못했지만, 곱기로 따지면 엄마만큼이나 곱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늘 엄마한테는 엄마가 제일 곱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백설 공주의 거울보다는 훨씬 눈치가 있는 편이었다.

 

 

  시골의 겨울은 길었다. 봄은 언제 오나 기다리다 목이 기린만큼 길어질 참이었다. 그리고 그 긴 겨울동안 서울에서는 겨우 서너 통의 전화만 왔다. 다달이 붙여주는 생활비로 넉넉하게 살았지만, 아무래도 엄마는 쓸쓸한 모양이었다. 하루하루 철수 형 무리와 몰려다니며 즐거운 나는 엄마에게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엄마도 밖에 나가 친구라도 사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되돌아오는 소문들에 마음 다칠까 적극적으로 권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인 것도 있고 허무맹랑한 것도 있었지만 그 무엇도 누군가한테 생채기를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그래네 할머니가 빙판에서 넘어지시는 바람에 요즘 장그래는 할머니 대신 학고방에서 일을 봤다. 광춘이나 철수 형은 무슨 일인지 바빴다. 농사에 대해서는 낫 놓고 기역도 모르는지라 설명도 해주지 않고 단지 앞으로 바쁠 거라는 말만 했다. 겨울은 농한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농한기라고 펑펑 놀 수만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네 학고방에 자주 놀러갔다.

 

 

 

  "또 책 봐?"

 

 

  자주 붙어 있다 보니 정도 들고 이것저것 알음알음 장그래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의외로 학구파였다. 광춘이나 철수 형이 그래를 놀릴 때면 글쟁이네, 선비님, 샌님하며 놀렸는데 고등학교 진학해서 장래희망 조사할 때 그래가 시인이라고 써서 냈기 때문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두어 번 작은 상을 타기도 했다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놀러대니 나한테도 티를 내지 않았던 거였다. 나는 또 시인을 몰라 뵈고 투박하다느니 무쇠 같다느니 놀렸으니 더더욱 말을 안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도 무뚝뚝한 건 사실이다. 꿈이 시인이라는 애가 이렇게 딱딱해서야. 그래는 책을 읽고, 나는 그래를 관찰하는 게 늘 있는 일인데 그다지 지루한 기운이 없다. 이따금씩 그래는 책장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쏘아붙이곤 했다. 내 얼굴 닳아 없어지면 네 탓이다.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때면 예술가 같았다. 물론 죽을 때까지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 같다.

 

 

  ", 맞다. 외상값."

 

 

  그래의 할머니께서도 애연가인 덕분에 늘 가게 안에는 팔각성냥이 돌아다녀서 가끔 담배도 피우고, 외상을 달아놓고 먹고 싶은 군것질거리를 하기도 했다. 매일 외상을 갚고 또 다른 외상을 달아놓았다. 나날이 달아놓는 외상값은 그래를 만나러 올 때 좋은 구실이 된다. 사실 철수나 광춘이한테 놀러갈 때는 아침에도 철판 깔고 찾아가서 자는 엉덩이를 차 깨우며 놀러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너는 시골 늙은이처럼 아침잠도 없냐고 지랄을 하긴 하지만 주머니에서 달걀만 꺼내주면 그 지랄도 쏙 들어간다. 계란 하나 내고 아침밥을 얻어먹기도 하는데, 왜 장그래는 만나는데 구실씩이나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그래가 날 달가워하는 기색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장그래는 겨우 계란 하나로 꼬여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가끔 장그래는 벌떡 일어나 거미줄을 떼어냈다. 질긴 것들, 하면서 혀를 끌끌 차지만 거미를 죽이지는 않았다. 거미 죽이면 재수 없댔어, 할머니가. 변명을 달긴 하지만 특유의 감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나한테 장그래는 시인이었다. 거미를 보이는 족족 죽이는 사람은 시인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는 학고방 문을 일찍 닫곤 했다. 어차피 집안의 주 수입원은 과수원과 각종 농사로 벌어들이는 것이고 학고방은 할머니의 쌈짓돈을 버는 용도랬다. 학고방 안쪽에는 조그만 방이 있어서 장그래는 문을 닫고 거기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종이에 글을 끼적이거나 책을 봤다. 나는 장그래의 책을 빌려봤다. 내가 장그래를 시인이라고 인정하는 이유가 있다. 장그래는 자기가 무언가를 훔쳐야 한다면 은행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 가서 책을 훔칠 거라고 했다. 특이해. 장그래를 알아가는 것은 이런 묘미가 있다. 가끔 묻는다. 왜 이렇게 너 싫다는 사람한테 치대냐. 그럼 웃고 말지만 나는 그래가 흥미롭다.

 

 

  땅거미가 진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나란히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운다. 첫 모금에서는 성냥의 불내가 텁텁하게 났다. 잘 피우지는 않지만 장그래도 담배를 배우긴 했다. 흰 손가락에 긴 담배를 끼우고 석양을 바라보는 눈빛이 외로운 기색을 띄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피우던 담배를 끄고 새 담배를 꺼내 그 손가락에 있는 담배를 뺏어 그 불로 불을 붙였다.

 

 

 

  ", 너 뭐하냐."

  "그냥. 이렇게 피우면 더 맛있나 해서."

  "담배를 맛으로 피우냐."

  "그럼 뭐로 피냐."

 

 

  장그래는 말이 없었다. 잠시 내뿜은 연기가 스멀스멀 공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사람한테 왜 이렇게 치대."

  "아무나한테 치대는 거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치대는데. 관심 없으면 안 그래."

 

  징그럽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거미줄을 뗄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그러다, 근데 왜- 하며 말을 잇는다.

 

 

  "근데 왜 철수 형이랑 광춘이한테만 계란 먹이냐?"

 

  아.

  담뱃불이 치익하고 타들어갔다. 그래는 바닥에 비벼 불을 끄고 꽁초 끝을 이리저리 접어 여민 다음 멀리 버렸다. 집에 가자며 먼저 일어서 학고방 문을 열쇠로 잠그려는데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오늘 먹은 알사탕과 우유 값을 냈다.

 

 

  "외상한다며."

  "생각해보니 돈이 좀 남았더라고."

 

 

  거미줄은 다 찡그린 얼굴로 떼어내면서 거미는 죽이지 않는 장그래는, 다 찡그린 얼굴로 나를 떼어내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쩐지 이제 애써 외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간만큼 성실한 것이 없어 어김없이 봄이 왔다. 봄과 함께 좋은 소식도 함께 왔다. 아직 초봄의 아침은 싸늘했지만 승차권을 내고 버스에 올라타면서 입 꼬리가 귀에 걸렸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나는 요즘 아침마다 즐겁다.

 

 

 

  "썽유리. 오늘도 기분이 좋다?"

 

 

  광춘이는 눈곱도 못 뗀 얼굴로 베시시 웃으며 물었다. 철수 형이 눈곱이나 떼라며 핀잔을 놓고, 나는 오른쪽 눈을 후비던 광춘이 손을 왼쪽 눈으로 옮겨줬다. 광춘이는 왕눈곱을 떼어내 대충 교복에 문댔다. 곧이어 그래가 올라탔다.

 

 

 

  "연이, 안녕."

 

 

  내 말에 그래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사람이 밀려 타 좁은 틈에서도 팔꿈치가 매섭게 날아왔다. 사람 많은 데서는 좀. 하면서도 전처럼 연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윽박지르지는 않는다. 철수 형이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장그래 한석율한테만 너무 상냥하다. 서럽게."

 

 

  장그래는 남은 승차권을 세어보다가 짜증을 냈다. , 장미래. 또 내꺼 훔쳐갔네, 하면서. 철수 형 말은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같은 반 되니까 없던 정이 좀 생기디?"

 

 

  거기에 또 사족을 붙이다 결국 장그래 팔꿈치에 역습을 당하고서야 형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스멀스멀 웃음이 났다. 오늘도 내 도시락 안에는 계란 후라이가 두 개다. 내 꺼 하나, 짝꿍인 장그래 꺼 하나. 물론 결국에는 광춘이와 철수 형이 반쪽씩 뺏어가긴 하지만.

 

 

 

 

 

 

 

  철수 형은 참 좋은 사람이다. 워낙에 덩치가 산만큼 커다란 데다 생긴 것도 무하마드 알리랑 닮아서 별명이 알리였다. 정작 본인은 쓸데없이 싸울 일 많은 별명이라 싫어해서 주변 사람 아무도 그 별명으로 부르진 않았다. 겨울 끝자락에 전학 와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고만고만한 사내놈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었고 덕분에 내 학교생활이 평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광춘이로부터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돼서인지 학교는 영 어수선했다. 이 얘기, 저 얘기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곤 했다.

 

  그래는 만사에 시큰둥했다. 철수 형 무서운 사람이더라, 하고 들은 얘기를 전하니 콧방귀만 뀌었다. 그 인간이? 하면서. 그러더니 이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 좁은 동네라 말 짓기 좋아하는 사람 많다.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말들이 많으니까 걸러 들어. 철수 형 얘기든, 내 얘기든. 그리고 네 얘기도.

 

 

 

  안 그래도 장그래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는데 열린 귀에 아는 사람 이름이 나오니 절로 귀동냥하게 되어 두서없이 듣게 된 얘기가 꽤 되었다. 소문의 종착지는 소문의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자기에 대한 말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것 같아서 상관치 않기로 하였다. 사실 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특이할 점은 없었다. 그냥 예쁘장한 외모 얘기랑 그에 비해 더러운 성깔에 대한 다양한 사례 예시 정도. 가끔 지가 뭐라고 되는 것 마냥 도도하게 군다며 깎아내리는 놈들이 많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래가 뭐라도 되니까 저 치들이 깎아내리기 바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는 연필을 이상하게 쥐었다. 그래서 필기를 하다가 늘 연필을 내려놓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수학시간인데 필기가 칠판 한 가득이라 모두 고개를 처박고 졸거나 필기를 하기 바빴다. 그래는 연필을 제대로 못 쥐니 힘이 잘 안 들어가고, 손목까지 힘이 들어간 게 보일 정도로 연필을 꽉 쥐었다. 글 써야 하는 애가 저렇게 연필 쥐는 것도 모르고 힘들여도 되나. 나는 엄마가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어주며 직접 가르쳐주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래의 연필을 들고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뭐하냐고 작게 속삭였는데, 내가 그 손을 잡고 연필을 엄지손가락에 끼우고 손가락들을 하나씩 접어 자리를 잡아줄 때까지 가만히 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 빼고 살살. 손목에 힘 많이 주지 말고."

 

  그래는 또다시 거미줄을 떼어낼 때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쥐어준 그대로 연필을 쥐고 끝까지 판서를 따라 적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그래는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젓가락질은 드럽게 못하는 게."

 

  귀 끝까지 빨개져서 그렇게 핀잔해 봤자 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힌다.

 

 

  "그럼 네가 나 알려주면 되겠다."

 

  씩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니, 그래는 또 표정으로만 거미줄을 떼어냈다. 나는 이제 그 표정이 퍽 귀엽게 느껴져 노여움도 안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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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투식스 기념!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